고포와 태평천국의 이야기(古炮与太平天国的故事)
발표 일:2021-02-02

 천심각(天心阁)의 창원은 군사보다는 문화에서 비롯됐지만, 창사가 외적을 만날 때마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됐다.천심각은 조망초와 신호대, 전선 지휘부, 전투영루 등 특별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창사에서 벌어진 많은 전쟁들이 이를 증명한다.명청 이래로 이곳은 병가의 필전지가 되었다.이는 천심각이 고대 장사성 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높은 곳에 올라 종목을 바라볼 수 있고, 그 지세가 험준하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성 전체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청가경 25년(1820) 천심각하(天心閣下) 성벽 위에 남북 두 달 성을 더 쌓고, 포동(砲洞) 4개를 설치하고, 토포(土砲) 4문을 설치하였다.함풍 3년(1853)에 이르는 천심각 좌우의 성벽에는 9기의 포대가 추가로 설치되어 중병들이 지키고 있었다.그만큼 천심각과 그 위치는 전시(戰時) 군사 요충지라는 임무를 동시에 맡게 된 것이다.

도광 30년(1850)에 낙병장이 호남순무를 맡았는데, 철불사 안에 큰 철불 몇 개를 크고 작은 대포 두 개로 만들라고 명하였고, 큰 포 5천 근을 초조문성에 두어 홍포대장군이라 명하였는데, 작은 포 하나는 남문성 위에 두었다.로크 순무는 신령과 군위를 하나로 묶어 사직과 백성을 지키자는 취지였는데, 그 대포가 나중에 실제로 쓰였다.1852년 태평군의 격전 때 천심각 성두(城頭)에 포탄이 실려 서왕(西王) 소조( 萧朝)가 귀진(貴戰)으로 망하면서 임시 보루를 만들었다.

1852년(함풍 2) 8월 28일 태평군 서왕은 소조귀(萧朝貴), 익왕석달은 홍수전의 명을 받들어 오천선봉부대를 거느리고 예릉 쪽에서 장사(長沙)로 달려들었다.9월 11일 장사성 외곽의 석마포 방어선을 뚫고 거의 천 명의 수비군을 전멸시켰다.금분령을 지키던 청군은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다음 날, 태평군은 황토 재로 전환했고, 청군은 성을 무너뜨리고 되돌아갔다.여러 주(州)현을 잃고 파면되었으나 아직 물러나지 않은 순무(巡務) 로크 병장( 骆秉章)은 황급히 성문 폐쇄를 명령하였다.태평군은 대진을 숲이 우거진 묘봉에 묶어 서호교(西湖橋)와 금계교(金啓橋)를 점령하고, 견고한 민가와 제고를 통제하였으며, 즉시 포대를 구축하여 공성포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낙병장 순무의 후임으로 부임한 장량기는 운귀총독에서 물러난 직후부터 쿤밍에서 창사까지 이동하고 있었다.낙병장은 20여 년 동안 벼슬을 하면서 이런 큰 싸움을 처음 겪었는데, 어찌 감히 방심하고 예전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장량기가 창사에 도착하기 전 창사성이 태평군에 뚫리면 제 머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성안의 병력은 노약자와 병약자를 모두 합해도 8천 명에 불과하지만, 이미 지원하러 온 산시성 후보 지부 강충원의 초용은 비록 능숙하지만 단지 5백 명에 불과하다.선화지현 왕바오셍은 "전체 도시의 15~50세 남자들을 모아서 부고를 열어보내자"고 제의했다.이날 여만청의 뒤를 이은 새 제독 바우치 표범은 이른 아침부터 서낭당(성황당)에 들러 상길표를 받았다.그는 로크 순무에 백 명의 병사가 성황당 보살을 남문성루에 올려놓고 묘봉에 향초를 켜고 폭죽을 쏘자 장병을 이끌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장모(태평군을 지칭)를 없애 달라고 간청하는 기책을 올렸다. 

태평군은 절묘한 봉우리에 섰을 때, 소조귀, 석달개, 나대강, 임봉상, 이개방 등이 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다음 날 오후, 이개방 등은 삼천 명을 이끌고 남문, 유양문, 소오문, 금계교 등에서 로켓, 화탄을 성내로 계속 투사하여 매우 격렬하게 싸웠으며, 수비에 못 이겨 성 안 곳곳에서 불이 나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성 안에 있던 청군 병사들은 모두 성벽으로 올라갔고, 청장년 백성들도 전쟁터를 누비며 태평군을 막아 성 위로 올라오게 했다.그러나 태평군은 성에 오르지 않고 해질 무렵에는 폭격을 멈추었고, 그러나 류다웨이의 150명의 토영 형제들은 남문에서 소오문까지 이르는 성벽 아래 다섯 군데가 땅벼락과 화약을 놓고 폭파하기 위해 구멍을 파고 있었고, 성벽의 수비군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6시경 태평군의 군호가 갑자기 불리자,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 포가 일제히 발사되었고, 5천 명의 장병들이 정식으로 성을 공격하였다.남문에서 소오문 일대에 이르는 성벽 외벽에는 무수한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태평군 병사는 손에 큰 칼을 들고 원숭이처럼 기어올라갔지만, 하나같이 수비군에 의해 맞아 넘어졌다.남문의 한 구름사다리에서, 한 태평군 병사가 성머리에 올랐는데, 그가 칼을 휘둘러 죽여 성루에 이르러 성황보살에게 접근하여, 재빨리 등 위에서 기름을 가득 채운 대죽통 두 개를 떼어내어 보살에게 뿌리고, 마침 성루에 날아온 화탄을 주워서 보살에게 던지자, 순식간에 큰불이 거세게 타올랐다.순간 성루도 불타고 청군은 아연실색했고, 성 밖의 태평군 장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바로 이때 성벽의 발아래에서 갑자기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터져 다섯 곳의 성벽 아래의 굴착점이 모두 폭발하는 소리가 났고, 세 곳의 구멍이 크지 않아서 청군은 재빨리 그것을 막았다.오군 문 가까이에서 서너 장 너비의 아가리가 터져 나왔고, 임봉상이 호령하자 천태평군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동굴 입구로 몰려와 막동 청군 칼과 창을 엇갈리게 하고 서로 뜯어내자 시체가 동굴 입 안팎을 가로질러 성벽돌에 피를 묻었다.수백 명의 태평군이 이미 성내로 돌진하여,성 밖의 태평군 장병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왔다.바로 이때 청군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운남초웅협 부장인 덩샤오량이 이끄는 삼천진 병사가 성밖에서 태평군 진영으로 돌진해 오는 격전이 있었는데, 태평군은 잠시 원군이 몇개 방면에서 온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포위당할 염려가 있어 소조귀의 명을 받자 덩샤오량 영병이 일진을 소탕한 후 성내로 돌진하였다.

전쟁이 중지하고 공격과 수비 쌍방은 모두 휴식정비단계에 들어섰다.얼마후, 청나라조정에서 보낸 원군 장령들이 잇달아 장사로 왔다. 수녕진 총병과 춘, 귀주성 진 원진 총병 진정삼, 허난성 허베이진 총병 왕가림, 부도통 (王家林民), 부도통 (都道府)을 받아 융융아 (王家隆)를 호송하는 호위개륭아 (王家隆) 등.이때 새로 부임된 순무 장량기는 마치 시루속에 들어간듯 밤낮없이 은냥을 모아 군대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매수하며 작전대책을 찾고있었다.

어느날, 순찰 장량기는 성안의 시정을 순시하던중 동정도끝에 지원군을 오는 섬서후보지부인 강충원을 만났다. 그는 전쟁을 의논할 때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고 수성과 청군 전단의 실패원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한후 다음 단계의 작전건의를 제기하였다.지형도 장사를 벽에 걸 려 있는 성남 천심이 각은 장사 청의 감 제고 지를 다른, 이곳이 막강 한 화력을 배치 남대 문밖을 통제하다.장사성내의 5,000근되는 포왕을 가까운 시일내에 옮겨와야 한다.천심각 맞은편은 채공묘로서 천심각과 대치되여있어 동남쪽을 차단할수 있다.이곳은 손자가 말하는"땅다지기"이고 묘봉 (먀오피오)도 땅다리기.이에 장량기는 전적으로 찬동을 표시하면서 강충원이 군대를 거느리고 싸우면 일찍 위명을 떨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두 사람의 이야 기가 투기 Jiang Zhongyuan 장에 순무 좌종당을 추천 한다.좌종당을 말하자면, 당시 호남성에는 호남성에서'삼량'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노량, 소량, 금량이라고 하는데, 금량은 바로 좌종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군사적 재능이 지금의 제갈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Jiang Zhongyuan 왼쪽"용 공명은 오직 거인은 이라고 말 했다.또"요즘 세상은 분란에 차 있다"고 했다.사실, 장량기는 좌종당의 재능에 대해 일찍부터 들은 일이 있다. 그가 장사에 도착하자마자, 호림익 등이 좌종당을 힘껏 추천해 주었는데, 장량기는 강충원의 앞에서"좌종당을 례의로 초빙한다."는 태도를 표했다.강충원은"좌종당은 강직하고 도도하지만 금비만은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마지막 두 사람은 디자인 좌종당은 상 음 고향에서 온 장사, 시국을 구하기 위해 좌종당 승낙 시행 지내 자 Zhang Liangji의 막 부에 가입하였다.

좌종당은 충분히 지략이 있는 선생이다. 어느날, 장량기가 그에게 말했다."쿠은에 얼마 남지 않았고, 조정의 군비는 또 잠깐 다니지 못한다.좌종당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지 못 한 계략을 생각 해 냈다 찾아 부자들의 돈을 빌렸다.그는 순무아문에 상홍문연을 차려 놓고 장사 갑부 황면, 보제약방 하원, 리생비단점 손관신, 십리향장원 구양조웅 등 네 사람을 청했다.이 Zhang Liangji로 소프트 좌종당 손님에 맞 춰 좌종당은 구사하는 전술을 취하여 그들에게 장사 성이 함락 여부를 알를 높 여야하는 그들의 재산과 생명에 관 한 결과, 동시에 배정 한 위엄 있는 칼을들고 하사관 연회장에서 앞을 지키고 먼저 태도를 표명은 기부 한 가마를 배웅하는 태도를 표명 하지 않았다는 계속 술을 권하면서 엉망 KuoLao들 모두 가 낚시 못 낚을 삼키 며처럼 하나의 태도를 표명 하지 않으면 안 될 사성과 보장을 위해 최선을다 했다.이번 은전 120000 liang 모금을 모두 Zhang Liangji 반색하고 불을 껐고 더 좌종당의 슬기를 매우 신임 한다.

10월 초, 태평군 북왕 위창휘와 정승상인 진일고가 천왕 홍수전의 명을 받아 1만여명의 병마를 이끌고 장사 남문밖으로 갔다.샤오차오구이, 스다카이, 웨이창후이, 친르강 등은 전면 진격을 하기로 합의했다.

수비군면 Jiang Zhongyuan 좌종당 등을 거 쳐 사람의 재배치 수비 더욱 빈틈없다.서원, 성남 서원 일부 ShiZi도 칼을들고 성벽 위로 올라 갔다.강충원의 초용은 천심 각교성밖에 자리잡고있는 채공묘의 고지를 차지한다.천심이 각에는 일찍 광서 제독에 뻗어 나가는 전날, 영춘 부는 이미 풀 먼 성루에 5, 000근 대포들 천심이 각에 일선의 민가를 남성 외에 전부 터 망, 엄폐 물을 잃게 되는 태평 군이 장소, 접근 불편 성벽 도시에서 순찰을 강화하고 성 밖의 동정을 감시, 태평 군의 재발을 막기 위한 배속에 구멍을 파다.

태평군은 성벽 아래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굴을 파고 성내로 직통하는 이런 행위를 수비군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려웠다.동시에 그들은 잘못을 보면 도시의 교훈을 일부 특수 무기를 준비하였다.이날 새벽, 태평군 1만 5,000명의 병사는 장사성을 향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밀집된 포화의 엄호를 받으며 동쪽의 오문으로부터 서쪽의 소서문까지의 성벽 밖에 구름사다리를 놓고 힘차게 성에 등성하였다.천심각에서 5,000근의 대포의 강대한 화력은 끊임없이 태평군진지를 향해 돌진하였는데 성벽의 발밑에 사람이 있는것을 발견하면 성곽에서 아래로 돌멩이를 부었기에이 지역에서 태평군은 승리하지 못하고 성벽에 접근할수 없었다.다른 지역의 여러 계단 위에서는 태평군이 연이어 성곽에 등성하여 성공하였다. 태평군은 성정상에 다달았을 때 성곽을 향해 줄을 묶은 철제 고리를 던졌다. 성벽 앞에 있던 청병들은 힘껏 끌어내렸고 청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태평군 병사는 칼을 빼들고 성 안으로 쳐들어갔다.일부 청나라 군사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서로 도피하였다.이리하여 두시각도 안되여 태평군은 성벽 몇단을 점령하였다.

남문서쪽에서 땅굴이 성벽 밑으로 파고들자 갑자기 커다란 파렬구가 생겼다. 태평군 일대는 성안으로 돌진하여 천비궁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이곳에서 락을 즐기던 등소량 등을 만났다.바로 이때, 남성 KuiXing 건물 옆의 성벽 아래 또하고 커다 란 소리 가나면서 성벽을 폭파하 너비 5장의 구멍이 생 겼고 청군 당황하고 밖으로 몰 려 성내 도망 하여 좌종당 소식을 듣고 여러 말이 달려오고, 큰소리로 병사들에게 명령으로 막 동, 그러나 아무도 출입 금지, 누구도 그를 알지 못 한 때문에 좌종당 급하게 위병 몇 개를 비롯 해 도망자를 잡았고, 현지에서 참수, 그제야 그들을 제압하다.좌종당 드럼통 명령과 화약을 헹 가래 입구 불을 붙이 자 갑자기을 형성 벽난로, 성 밖의 태평 군 만나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득점만 작은 돌격 입성, 좌종당 또 급하게 서둘러 돌로 꽉 막히고 즉석에서 구두로 공고:누구나 돌 틈에 함께다 1, 000문이다.한순간 돌멩이가 각처에서 날아와 무수한 태평군병사들이 짓부셨으며 그중에는 태평군과 싸웠던 청병도 박해를 당했다.한 위병은 좌종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우리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을 때려죽였습니다.좌종당은 화가 나서"허튼소리!"라고 말하였다.

이때 천심각하에서 소조귀는 한창 포화와 비석을 무릅쓰고 말을 타고 성안에 오르는것을 지휘하고있었다.갑자기 하늘에서 포성이 울렸다. 포성이 비오듯 날아왔다. 그는 머리가 천둥번개처럼 내리치는것 같았다. 두눈이 캄캄해졌다.성벽에 있는 청군은 이런 상황을 보고,"소조귀를 죽여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진공하고있던 각 태평군 병사들은 삽시에 진지가 혼란해져 사기가 크게 진작되여이 기회를 타서 맹공격을 발동하였다.그때 석달개가 급파령을 내려 징을 철수시켰는데 이미 입성했던 태평군병사들은 하는수없이 성밖으로 기여나왔다.

10월 17일, 석달 개가 삼천을 거느리고 마 상 강을 건너 500명 류 수 륙 우에서 잠복하고 HouZiShi에서 부교를 타고~하서, 동서 양쪽을 하나로 련 결 된, 그리고 점령 룡 회 담, 양후, 록과 溁 베이 진 일대 녕 향, 상향으로 통하는 큰길을 지배하고, 군사적 주동 권을 얻었다.이 소식이 성내에 전해지자 순무아문들은 또 몹시 당황해하였다.장량기는 밤도와 좌종당과 대책을 상의하였다. 우선 향영에게 3,000명의 청병을 거느리고 주장으로부터 부교를 건너 륙수주로 직행하여 태평군의 동서 량안의 련락을 끊도록 하였다.태평군은 도리여 주남삼림속에 매복해있으면서 청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향영은 숲속에 깊이 들어갔는데 매복습에 빠졌다. 대부분 병사들이 불에 타 죽은것으로 한것을 분별하고 위병의 보호하에 영영은 빠져 나와 궁지에 빠졌다.이와 동시에 수녕총병과 춘과 하남, 하북 총병 왕가림은 각각 2,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남북 두곳에서 태평군을 포위공격하다가 석달개부의 결사적저격을 받아 10여차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강중의 부교를 쟁탈할 때 또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좌종당은 천심각에서 수륙의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을것을 추측하고, 또 3개 노선의 일꾼들이 전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보며"이 먹통들 어디서 이렇게 무능해!"라고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이때에 태평군이 장사의 성밖으로 들어온지 이미 81일이 되여 오래동안 함락할수 없었으나 청조조정의 지원군은 끊임없이 증가되여 장사를 섬멸하기 위해 태평군을 포위하려고 준비하고있었다.그리하여 태평군은 정세를 잘 헤아려 11월말에 장사에서 철퇴하고 장구직북하였다.장사성은 태평군이 상남에 진입하여 싸운 이래 유일하게 함락하지 못한 성이였다.